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헬무트 슈미트 (문단 편집) === 연방총리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Bundesarchiv_B_145_Bild-F048808-0033,_Bonn,_Neubau_Kanzleramt,_Schmidt_im_Arbeitszimmer.jpg|width=100%]]}}} || 1974년 [[빌리 브란트]]는 [[슈타지]]의 요원이 간첩임무를 맡고 자신의 비서로 활동한 것이 적발된 [[귄터 기욤 사건|귄터 기욤 간첩 사건]]과 섹스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미 사민당 수뇌부는 심각하게 이미지가 실추된 브란트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차기 총리로 슈미트를 내정한 상태였다. 결국 브란트가 사민당 내부의 사임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사퇴하자 브란트의 뒤를 이어 슈미트가 [[서독]]의 총리 자리에 오른다.[* 다만 슈미트 본인은 브란트의 사임에 대하여 '나도 총리를 해보고 싶긴 하지만 이렇게 당신이 물러나는건 말도 안 된다'며 강경히 반대 입장을 펼쳤다.][* 이 때 사민당 중진들이 브란트의 총리직 용퇴를 유도하기 위해 브란트 종신 당대표, 슈미트 총리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이 때문에 슈미트는 역대 사민당 출신 총리 중에 유일하게 '''당권 없는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슈미트의 정치적 수제자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당정을 모두 휘어잡았고, 연정 파트너 녹색당과의 불화 없이 안정적으로 집권한 것과 여러모로 대조적.] 그가 총리 자리에 취임했을 때 서독은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있었다. 사회적으로는 [[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C%9D%BC%EC%9D%98_%EA%B0%80%EC%9D%84|독일의 가을]]이라 불리는 시기였다. [[68혁명]] 이후 온건파와 분리된 강경 학생 운동 세력들이 [[바더 마인호프|적군파]]가 되어서 사회 주요 인사들에 대한 납치 및 암살과 테러를 자행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독일 경제를 강타하여, 서독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귄터 기욤 간첩 사건이 터지자 기민당의 공세 속에 사민당은 큰 위기에 봉착했고, 설상가상으로 브란트 총리의 섹스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당은 절체절명의 당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슈미트는 사민당에서 매우 우파적인 인물이었고,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실용주의]]의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경제학적으로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슈미트는 자신의 브란트에 대한 신뢰와 호감과는 별개로 브란트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동방 정책]] 및 경제 정책 등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 노선을 추구하던 브란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소위 [[대서양주의]] 성향을 띄는 정치인이었다. 이것 때문에 중남미의 군사정권들도 은밀히 대거 지원했다. 총리가 된 슈미트는 좌우파 [[이념]]을 초월해 각각의 문제들에 접근했다. 이런 그의 태도가 와해될 뻔한 사민-자민당 연립정부를 장장 13년 간 유지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실용적 중도노선은 좌파들이 보기에 불만이었고 때문에 사민당 내에서도 상당한 반대 세력을 형성했다. 특히 [[68 혁명]] 출신으로 브란트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입당했던 급진 좌파들이 당내 독자 세력을 형성하면서 그의 임기 후반에는 슈미트 총리와 강력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총리 취임 직후 수감중인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행해진 야당 정치인의 납치에 굴복하는 실수를 범한 후, 독일 내부에서는 각종 납치와 테러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교훈을 얻은 슈미트 내각은 이후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기본 기조로 내세우며 일괄적인 강경대응을 펼쳐나간다. 이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바로 [[1977년]] [[소말리아]]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루프트한자]]의 민항기를 납치하자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특공대를 파견해서 민간인 피해없이 테러리스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사건]].[* 참고로 이 사건 당시 테러리스트들은 투옥된 적군파 간부들의 전원 석방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 승객만이 아니라 당시 적군파에 의해 납치된 서독 기업인협회장이었던 슐라이어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슐라이어는 결국 진압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에서 엉성히 대응하다가 최악의 결과를 빚어냈던 불과 6년전 독일 특공대의 모습과 비교하자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 진압작전의 성공 이후 안도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슈미트는 후일 진압작전이 잘못됐을 경우 총리직에서 물러날 각오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상기한 바와 같이 [[케인즈주의]] 신봉자였던 슈미트는 취임 초기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 속에서 적극적인 확장 재정정책을 실시하여 실업율을 낮추고자 했다. 아울러 변동환율제 실시와 적극적인 수출장려를 통해 물가상승에 제동을 걸고자 하였다. 그는 확장 재정적책을 통해 경제성장과 복지라는 상반되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선언했고 실제 70년대 후반에는 경제가 회복세로 들어서면서 효과를 보기도 했으나 이에 수반된 심각한 재정적자가 결국 후일 그의 실각을 불러오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1975년]] 그는 "거주지 변동의 자유, 의사소통의 자유, 인권 보장"을 내세우면서 [[소련]]으로 하여금 헬싱키 협약에 서명하게 했고, 이는 이후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정작 슈미트의 임기중에는 [[1980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망했어요]]~~ 슈미트는 과거 장관 시절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가하기도 했었지만, 동방정책 자체의 필요성에는 찬성했기에 기본적으로 동방 정책을 계승하면서 동독과 서독 사이의 교류를 증대시켰다. 다만 브란트의 맹목적인 동독 퍼주기에 대해 비판했던 만큼 동독 경제 지원에 대해서는 다소 신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액수의 동독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NxMu3d5jebY)]}}} || || {{{#white '''1976년 총선을 3일 앞두고 치러진 토론회'''}}} || '''사민당은 1976년과 1980년 치러진 총선에서 모두 [[CDU/CSU]]에 패배'''하며 제2당에 머물렀지만 '''자민당과의 연정을 유지해 집권'''에 성공하였다. 1976년 총선에서는 [[1975년]]에 서독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등 경제분야에서 최악의 성적을 보이고 있어서 기록적 참패가 예상되었으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찾아온 TV 토론에서 특유의 냉철함과 명민함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여론을 반전시켰고, 결국 순전히 헬무트 슈미트의 개인기로 참패를 면했다.[* 상대편 수장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역시 대단한 달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헬무트 슈미트한테는 역시 상대도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TV 토론 동영상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헬무트 슈미트가 한 마리 [[호랑이]]와도 같다면, [[헬무트 콜]]은 한 마리 [[곰]]을 연상케 한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불독]].--] 1980년의 총선에서는 헬무트 슈미트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사민당의 지지율도 지극히 저조한 가운데 선거를 치루었지만, 1976~1979년의 독일경제가 회복세로 접어들었던 데다가 슈미트 총리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지지도를 바탕으로 선전하면서 자민당과의 연정을 다시 수립,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연정을 통해 판을 뒤엎으며 정권을 이어갔지만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은 7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의석수가 감소한 반면,[* 빌리 브란트 시절인 1972년 총선의 경우 사민당은 지역구 48.9%, 비례대표 45.8%의 지지율로 전체 518석 가운데 242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1당을 차지한 바 있었다. 그러나 1976년 총선에서는 사민당 의석이 214석으로 무려 28석이나 줄어들었으며, 지지율도 지역구 43.7%, 비례대표 42.6%로 하락하여 기민-기사연합에게 원내 제1당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다행히 1980년 총선에서는 228석으로 사민당이 의석수를 다시 늘렸으나, 기민-기사연합을 제1당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하였다.] 연정파트너였던 [[자유민주당(독일)|자민당]]의 의석수는 증대했다.[* 자민당은 1972년 총선에서 겨우 42석 밖에 못 얻었던 정당이었고, 1976년에도 40석밖에 못 얻고 있었으나, 1980년 총선에서는 54석을 얻는 등 약진하였다.] 이에 따라 연정 내에서 자민당과의 알력이 심화되는 그림자가 있었고[* 1980년 선거 직후의 총리 신임투표에서도 자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서 사민당을 경악시켰다.] 여기에 두 선거 다 야당인 [[기민당]]이 원내 제 1당이었던 점은 덤.[* 1972년에 234석에 불과했던 기민-기사연합의 의석수는 1976년에 254석으로 늘어나, 이로써 기민-기사연합은 사민당을 다시 꺾고 제1당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1980년에는 기민-기사연합의 의석수가 줄어들었으나, 그래도 237석을 지켜서 여전히 제1당을 유지하였다.] 제1당임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된 기민당의 파워는 사민당 정권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연정은 [[1982년]] 마침내 파국으로 치달았다. 제2차 오일쇼크로 서독 경제는 다시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슈미트 정권이 그간 펼쳐온 확장 재정정책이 역효과를 불러와 재정적자로 심화되었고, 서독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독일경제는 1980년에 1.3%, 1981년에는 0.1%의 성장률을 보였으며, 1982년에는 마이너스 0.8%의 성장률로 오히려 경제가 쪼그라들었다.] 재정적자 문제가 심해지면서 1차 오일쇼크 때보다 더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결국 악화되는 재정적자 문제를 두고 사민당 당내 분열이 생기고 말았다. 68혁명을 전후해 사민당에 입당한 학생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사민당 내 강경 좌파그룹을 형성하며 노조와 연대하여 대대적인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 인프라 투자확대, 대기업 국유화 등 이른바 '체제극복적 개혁(systemüberwindende Reformen)'을 주장하는 등 슈미트 내각을 압박했던 것. 게다가 사민당 의원 대다수는 퍼싱-2 미사일의 서독 배치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1983년 11월 쾰른에서 열린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약 400명의 대의원 가운데 겨우 14명만이 퍼싱-2 미사일의 조건부 배치에 찬성했다. 사민당의 나머지 대의원들은 가급적 소련에 대해 SS-20 미사일의 철수를 읍소하되 만약 소련이 거부할 경우 SS-20의 동독배치를 용인하자는 입장이었던 것. 만일 자민당이 슈미트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어도, 슈미트는 1983년 [[뮨파|자당 의원들의 배신]] 때문에 실각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민당 총재였던 빌리 브란트는 강성 좌파 그룹에 우호적인 스탠스였다. 물론 슈미트 내각은 이러한 당내 반발에 계속 강경하게 맞섰지만, 당내 강경 좌파그룹의 목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자 사민당-자민당 간의 연대는 점점 약화되었으며 자민당도 사민당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거두기 시작했다. 이때 기민련의 총재였던 [[헬무트 콜]]은 끊임없이 자민당에게 연립 정부 구성에 대한 러브콜을 날렸다. 자민당은 고민 끝에 사민당과의 연정 이탈 및 기민-기사 연합과의 연정 구성에 합의함과 동시에 [[내각불신임결의]]안이 연방 하원 의회에 상정되면 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9월 17일 '''자민당 소속 각료들이 모두 사퇴하면서 사민당-자민당의 연정은 붕괴'''되었다. 자민당 출신 장관들의 사퇴로 인해 슈미트는 불신임될 때까지 2주간 외무부 장관까지 겸직해야 했다. 1982년 10월 1일 연방 하원 의회에서 '''[[내각불신임결의]]안이 가결'''되면서 그 자리에서 슈미트는 실각했고 [[헬무트 콜]]이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구 서독 및 현 독일은 [[의원 내각제]]이며 독일 기본법(헌법)에서는 [[내각불신임결의]]안 제출시 반드시 사전에 차기 총리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 때문에 구 서독 및 현 독일 총리들은 재임기간이 비교적 긴 편이다. 보통 건설적 [[내각불신임결의]]로 불리며 해당 항목을 참조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총리가 불신임된 것은 독일연방공화국 헌정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슈미트는 의회의 불신임으로 물러나게 된 첫번째 독일 총리가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bTCB20cPtxY)]}}} || || {{{#white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 표결이 통과되면서 헬무트 콜이 신임 총리로 선언되는 장면 '''}}} || 불신임안 통과 직후 슈미트[* 슈미트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단지 이렇게 물러나는 것(연정이 붕괴된 것)이 아쉬울 뿐"이라는 소회를 남겼다.]는 신임 총리 콜에게 축하인사를 건내자마자 언제 총선을 실시할 것이냐는 날선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이에 콜은 국민들에게 직접 신임을 묻기 위해 내년 3월 6일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답했다.[* 이 질의가 왜 나왔냐하면, 선거가 아닌 불신임에 의한 정권교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이런 식의 정권교체가 정당한지 여부에 대해서 독일 내부에서 격론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불신임안의결이 의회에서 투표에 붙여지기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헤센 주 선거에서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대거 사민당과 녹색당으로 이탈하는 바람에 자민당은 아예 주의회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참사를 맛봤다. (참고로 선거 결과 자체는 기민당이 주의회 내 1당으로 등극했지만 과반에 미달해서 2당 3당인 사민당과 녹색당이 연정을 구성해버렸다.) 이러한 선거결과를 바탕으로 헬무트 슈미트는 불신임안 투표 직전 연설에서 자민당에게 "당신들의 처리 방식은 합법적이지만, 내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신임총리 헬무트 콜은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쿨하게 4개월 안에 총리직을 건 조기총선을 시행하겠다고 밝혔고, 조기총선 결과 압승을 거둔 콜은 16년 장기집권하면서 최장수 총리가 되었다.] 이어 콜은 3일안에 서둘러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간 사민당이 제2당임에도 불구하고 집권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연정 파트너 자민당 총재인 겐셔에 대해서는 "다시는 겐셔와 사진을 찍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뒤끝을 보여주었다.[* 다만 이건 단순히 불신임만이 아니라 겐셔가 지속적으로 빌트 지를 포함한 보수일간지에 정부의 정책과 관련해서 불만을 털어놓면서 연정관계를 의도적으로 뒤흔든 것에 대한 분노도 섞여있었다. 불신임안이 상정되기 이전 내각회의에서 슈미트가 "사민당과 나의 정책에 불만이 있으면 빌트 지에 내뱉지 말고 여기서 우선 얘기해라."라고 화를 낸 적이 있을 정도.] 참고로 겐셔는 1974년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면서부터 외무장관을 맡았다가 1982년 불신임 2주전 장관직을 잠시 사퇴했다가 다시 기민-기사 연합과의 연정에서 외무장관에 재취임하면서 [[독일 재통일]]이 이뤄진 뒤인 1992년까지 무려 '''18년 간''' 외무장관을 맡으며 동서독 통일을 세계 각국으로부터 공인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슈미트가 국민들에게 총리로서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가 모든 일을 그렇게 나쁘게 처리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였다. 8년간 총리로서의 평가가 나쁜 편이 아니고 선거로 심판받은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로 물러나게 된지라 억울한 마음도 있었을텐데도 겸손한 소감을 남긴 것. 이후 슈미트의 요구를 콜이 받아들이면서 1983년 3월 6일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사민당은 한스요헨 포겔이라는 새로운 얼굴 내세웠지만 오히려 의석수가 줄어드는 패배를 당했고 [[CDU/CSU]]와 [[자민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헬무트 콜]] 총리가 제대로 국민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